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난창 군무선후회의 (문단 편집) == 결과 == 2월 말까지 이어진 회의에서 결국 각 군장들은 군제 개편에 대한 구체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고 장제스의 의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특히 탕성즈는 2월 초 8군 산하에서 35군과 36군을 추가로 편성하고 [[허젠]] 등을 군장으로 임명하는데 동의해야 했다. 매월 1000만원이 소요되는 군비에 대해 호북성과 강서성이 각각 300만원, 호남이 60만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재정부가 맡아 각 성의 인화세, 관세를 재정부에 납부하기로 결정했고 우한 정부는 900만원의 화폐를 3개월에 걸쳐 발행했다. 또한 2월 9일 탕성즈가 호남성 재무위원회에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1927년부터 중앙이 매월 60만원을 8군에 지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후 군비 문제로 장제스와 난창의 불화는 심각해저 재정부장 쑹쯔원과 장제스의 사이가 크게 악화되었고 장제스는 12월 25일 쑹쯔원이 12월 1일자로 더 이상 재정부가 1군에게 군비를 지급하지 않을 것이니 군비를 현지조달하라고 통보한 전문을 인용하며 군비를 중앙에 직접 발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임조함은 2월 6일 [[미하일 보로딘]], 쉬첸, [[쑨커]] 등이 1928년 2월 6일 연석회의에서 재정을 공개해 자군을 중심으로 군비를 지급하는 장제스를 비난했다고 일기에 서술하고 있다. 여기에 [[천도논쟁]]에서 패배하고 3중전회에서 권력이 대폭 축소된 장제스는 자파로 끌어들이려 했던 주페이더, 청첸 등이 도리어 반장으로 돌아서서 휘하의 1군을 제외한 모든 군과 잘해야 중립, 심각하게는 적대관계를 구축하게 되어 최악의 위기에 몰리게 되지만.... 1927년 4월에 이를 [[4.12 상하이 쿠데타|한방에 일소]]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